출처 : https://blog.naver.com/hojong1974/150105851849
일제에 의해 훼손당한 경복궁의 진실
일제시대를 거치며 우리 민족은 숱한 설움을 견디며 굴욕을 당했지만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 또한 치욕스러운 대우를 받아야 했습니다. 현재 일본에 불법 반출되어 돌아오지 못한 문화재만 비공식적으로 1만점이 넘는다고 하죠. 게다가 남아있는 문화재라곤 모두 일제에 의해 훼손되었습니다.
만약 일본의 침략이 없었더라면, 그 찬란하던 조선의 5대 궁궐도 그 모습 그대로 보존 되었더라면, 대한민국은 유럽 못지 않은 그야말로 박물관 같은 도시를 자랑했을 겁니다. 전 MB 발언 중 아직도 잊지 못하는 것이 경복궁과 자금성의 규모를 비교하며 경복궁을 비하하는 듯한 발언을 했던 것입니다. 자금성 규모가 엄청나고, 전세계적으로 정말 유명한 궁궐 중 하나일 겁니다. 그만큼 관광객들도 끊임없고요. 가끔 중국인들이 경복궁을 자금성의 화장실 크기라고 조롱하기도 하는데 한때 우리 경복궁은 자금성 못지 않은 규모를 자랑했다는 걸 아시는지요. 또한 알다시피 조선의 궁궐은 경복궁을 비롯해 총 5개였습니다. 이 5개의 규모를 합치면 자금성은 비교도 안됩니다. 또한 자금성은 건축단계부터 그 규모로부터 '위압감'을 주기 위해 건설되었습니다. 그래서 자금성에 가면 나무 한그루 구경하기 힘들고, 담 또한 굉장할만큼 높은 걸 확인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경복궁은 자연과의 조화를 무엇보다 중요시하여 건축한 궁궐로 건물과 자연의 어울림은 말할 것이 없고 화려한 정원도 장관이죠. 일제에 의해 훼손된게 이정도인데 당시엔 어땠을런지요. 그래서 대부분 자금성을 남성적인 궁궐로 경복궁을 여성적인 궁궐로 표현합니다. 곧 자금성과 경복궁은 그 성격자체부터 매우 다르기 때문에 비교가 불가하다는 것.. 하지만 굳이 규모면으로 자금성과경복궁을 비교하자면 어떨까요. 일제시대 이전 경복궁의 규모는 경복궁 그 하나만으로도 자금성의 규모 75%입니다.
원래 경복궁은 7481 칸으로 330 동의 건물이 있던 광활한 궁궐이였습니다. (자금성은 9999칸, 현재는 8천칸이라고 합니다. 9999칸도 뻥튀기란 말이 있지요. 경복궁 하나 만으로도 자금성 규모의 75%입니다. 위에서 이미 말했다시피 조선의 궁궐은 5개였습니다. 이 5개를 합치면 어떻게 될까요? 현재는 일본에 의해 거의 다 사라졌지만 당시로 치자면 자금성은 갖다 댈것도 아니었을 겁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를 거친 후 단 36 동의 건물만이 남았고 10분의 1로 궁궐이 극심하게 훼손, 원래 크기의 10% 만이 남게 되었습니다.)
▲ 구한말 경복궁 사진으로 높은 담장안으로 수많은 전각들이 꽉찬 모습이 인상적이다
1918년에 창덕궁에 대화재가 일어나 침전이 모두 불타자 그 목재를 조달한다는 핑계로 경복궁의 침전인 교태전과 강녕전이 헐리고 창덕궁으로 옮겨감. 경복궁과 창덕궁의 훼손을 위한 일본의 고의적인 화재로 추정됨. 1929년 5월에 신무문 북쪽의 융무당과 융문당을 헐어 한강변의 용광사를 짓는데 사용함. 1932년 10월엔 조선왕조 역대 왕의 어진을 모시던 선원전을 일본인들의 사당인 박문사로 팔아넘겨 창고로 사용함. 192번지 남산장 별장을 만들때 경복궁 건춘문내에 있었던 비현각을 사용.
경복궁 동궁 자선당은 오쿠라라는 사람이 구입해서 바로 건물을 해체하고 일본의 자기집으로 가져가 <조선관> 이라는 개인 박물관으로 사용함. 그러다 1923년 관동 대지진으로 자선당은 불타고 기단과 주춧돌만 남은 그 자리에 오쿠라호텔이 들어서게 됨. 자선당의 기단과 주춧돌은 오쿠라호텔의 정원을 꾸미는 돌로 사용함. 1993년 목원대 김정동 교수가 호텔 구내 정원 벚나무가 가득한 산책길에서 버려져 있는 자선당 주춧돌을 발견함. 결국 우리나라의 요구로 95년 12월 한국으로 반환되지만 이미 상태는 최악이였고 쓸모가 없기에 돌려준 것임. 이처럼 일제의 조직적인 훼손으로 헐려나간 무수한 전각들은 일본인들에게 판매가 되어 일본인들의 개인저택 등으로 이용되었습니다. 혹시 경복궁에서 절에나 있을 법한 탑과 조각상들을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유교를 섬기는 조선의, 철저히 유교양식으로 지어진 경복궁에 탑과 불교 조각상이 있을리가 없어요. 일제가 전각을 다 허물어 버리고 궁궐과 유교의 기운을 꺾기 위해 전국 각지에 있던 불교 문화재들을 경복궁에 옮겨놓아 궁궐과 관계없는 불탑, 사리탑 등 유물들로 채워놓은 것입니다.
일제는 경복궁에서 두 차례의 물산공진회를 치루며 경회루 영역에 휴게실과 미술관을 지었다.
자경전 영역에는 수족관과 놀이터를 만들었다.
궁궐에는 깔지 않는 (무덤에나 깔던) 잔디를 경복궁 전체에 깔고, 온돌을 없애버리기도 하였다.
▲ 전각들이 거의 헐려 휑한 궁궐과 그 곳을 메운 잔디들, 근정전을 가린 조선총독부건물이 위압적이다.
경복궁자리가 명당자리이고 풍수적으로 굉장히 좋은 자리이기에 김영삼 정부에서 총독부를 파괴하기 전에 총독부 밑에 경복궁과 조선의 정기를 막는 말뚝이 박혀있을 것이라는 의견이 제기됐는데 실제 총독부 폭파후 총독부 밑에는 커다란 말뚝들이 박혀있었다.
1912년 조선총독부 청사 건립이 본격화되면서 수많은 전각이 헐리고 1914년에는 이듬해 이른바 '시정 5년 기념 조선물산공진회'를 경복궁에서 개최한다는 핑계로 경복궁의 중요 전각 몇 채를 제외하고 거의 대부분의 전각들이 무참히 헐려버린다. 경복궁 전체를 야외전시관으로 사용하고, 사정전 뒤쪽으로는 일제가정원과 공원으로 변모시켰다. 1935년에는 건청궁을 헐고 그 자리에 대한제국 병탄 25주년 박람회장을 만들었으며, 한 나라의 최고 궁궐인 경복궁을 일반인에 공개하기 시작했다. 일제는 경복궁에서 박람회와 진흥회를 열면서 "우리가 이 정도로 조선을 근대화하였다" 라는 홍보의 장으로 삼았다. 경회루 뒤쪽에는 골프장을 만들고 야외극장, 식당, 맥주회사, 은행, 유흥점 따위를 세우려 한 기록이 발견됨. 또한 곳곳에 육교와 지하터널을 만들려는 설계도 역시 발견됨.
[경복궁 복원도]
[일제강점기. 경복궁 내의 남아 있던 건물들]
[현재의 경복궁 모습. 30% 정도 복원 된 상태]
경복궁은 광화문광장 조성을 시작으로 대규모 복원공사가 진행 중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임진왜란 때 전소되었던 경복궁이 대원군 시절 다시 지어 질 수 있었을까? 또한 일제시대때 원형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하게 훼손당하였던 경복궁을 어떻게 7200 여칸의 각종 건물을 한치의 오차도 없이 그자리에 복원시킬 수 있을까? 그것은 바로 아래그림인 북궐도가 있기 때문이다.
[북궐도]
조선시대에는 경복궁을, 도성의 북쪽에 있다고 하여 북궐(北闕)이라고도 불리었다. 따라서 북궐도란 경복궁의 건물 배치도를 뜻하는 말이다. 대원군 시대에도 그랬고 현재에도 진행 중이지만, 이 북궐도가 있기에 두번의 대규모 훼손사태에도 불과하고 경복궁은 본래의 모습대로 다시 태어 날 수 있는 것이다. 현재 남아있는 북궐도는 대원군이 경복궁 중건공사를 마친 후 제작된 19세기 말 그림으로 추측된다. 도면은 접혀져 있는 '帖(첩)' 형태인데 완전히 펼치면 가로 2.8m 세로 4.3m 나 되는 엄청난 크기이다. 당시에는 史部(사부) 지리류에 소속되어있어 일종의 지도로 보았지만, 현대적 관점에서 봤을 때 건물 배치도에 가깝다. 위의 도면은 북궐도를 바탕으로 건축도면을 재구성한 것이다. 그럼 경복궁의 전체지도를 나타내는 복궐도 모습에 비쳐 현재의 경북궁 모습을 구글어스로 봐보자. 표피적으로 확 다가온다. 얼마나 훼손됐나. 일본 원숭이의 만행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그림이다.
북궐도의 길다랗고 동그랗게 경복궁이 들어서 있는 모습과 구글어스로 본 길다랗고 동그랗게 경복궁 터가 있던 곳.
경복궁은 2009년까지 전체의 40%를 복원하는 단기복원이 현재 진행 중이다. 유교양식의 궁궐에 보이는 불교양식의 국립민속박물관(20)이 참으로 언발란스하고 흉물스럽다. 궁궐내에 현대건물이 들어서 있고 심지어 주차장도 존재한다. 하루 빨리 정신차리고 복원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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