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재 신채호 선생 이래 역사학계에 뜨거운 논란을 제공했던 청나라 역사 연구서 '흠정만주원류고(欽定滿洲源流考)'가 세상에 나온 지 232년 만에 한국에서 처음으로 번역됐다. 우리의 사촌격인 여진족의 거의 유일한 역사서라는 점과 번역의 난이도를 고려하면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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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이 책의 번역자는 전문사학자가 아닌 검찰공무원 출신의 한학자라서 더 주목을 받고 있다. 번역자인 장진근 씨는 "그간 이 중요한 책이 번역이 안됐다는 점을 이상하게 생각해왔다"면서 "사학자는 아니지만 2년에 걸쳐 최대한 정확하게 번역하려고 노력했다"고 밝혔다.
책이 번역되는 데에는 고대사에 관심이 많은 누리꾼들의 힘이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때문에 이 책의 출간 역시 전문 역사학자들 보다 온라인 역사 커뮤니티 등에서 더 큰 화제를 불러 모으고 있다.
2년 전 번역을 결심한 장 씨는 자신의 블로그(blog.naver.com/ckchang1)에 번역한 내용을 차근차근 올리기 시작했다. 이 내용은 인터넷을 타고 삽시간에 소문이 퍼졌다. 낯설지만 역사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담고 있는 내용을 보러 누리꾼들이 그의 블로그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고난의 번역 작업이 누리꾼들의 열렬한 지지에 의해 힘을 얻어 2년 만에 완역의 결실을 거두게 된 것.
장 씨의 번역 원고는 다시 재야사학자들의 감수를 거쳐 정식 출판물로 거듭났다. 책을 출판한 뒤에도 장 씨는 원문과 번역본을 자신의 블로그에 PDF 파일로 올려놓았다. 마음껏 가져가 검증하고 오류를 지적해 달라는 의미다.
이 책의 어떤 점이 누리꾼들과 젊은 역사 연구자들의 주목을 받는 것일까? 무엇보다 책의 성격을 규정한 '흠정(欽定)'이라는 표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흠정'은 중국의 사서에서 자주 등장하는 표현으로 '황제가 직접 제도나 법률을 제정하는 것'을 뜻한다. 황제가 직접 짓거나 황제의 명에 의해 씌어진 책에도 '흠정'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때문에 '흠정만주원류고'란 '황제의 칙명을 받들어 만주(滿洲)의 원류(源流)에 대해 연구한 책(考)'이라는 뜻이다.
'흠정만주원류고'는 건륭 21년(1778년)에 지어졌다. 건륭제는 청나라의 르네상스를 이끈 3현제(강희-옹정-건륭) 가운데 한 명이자 청나라 문명의 결정체인 백과사전 '사고전서(四庫全書)'를 편찬한 인물이다. 그가 청 제국을 세운 여진족의 원류와 만주의 근원을 밝히기 위해 직접 편찬을 명한 것으로 미루어 꽤 중요하게 집필된 책임을 짐작할 수 있다.
게다가 이 책의 저술에는 청나라 인문학의 절정기에 중국의 모든 역사서를 모아놓고 탐구했던 훈고학(訓¤學)의 최고 권위자 43명이 동원됐다.
일찍이 '단군조선'과 '발해'를 재발견한 것으로 알려진 단재 신채호 선생도 '흠정만주원류고'를 통해 자신의 역사관을 재정립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단재는 '조선상고사'를 통해 우리 민족을 서술하면서 이 책을 직접 언급했다. 즉, '조선(朝鮮)'의 어원이 '조용한 아침의 나라'가 아니며 "'만주원류고'에 조선의 원래 발음은 쥬신이고 그 뜻은 주신(珠申)의 소속 관경(管境)인데 관경의 뜻은 우리 배달민족이 살고 있는 온 누리"라고 밝혀 주신에서 숙신과 조선이 나왔다고 주장했다.
뿐만 아니라 이 책에는 여진의 역사가 아닌 미처 예상치 못했던 우리의 역사가 줄줄이 흘러나온다. 부여(夫餘)와 삼한(三韓)의 역사는 물론 만주에 대한 연고권이 없을 것 같던 백제와 신라까지도 책의 주요 대목을 꿰차고 있다.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이 세워 약 200여년 존속한 것으로 알려진 발해(渤海)는 아예 여진족의 자랑스러운 선조로 당당히 책에 이름을 올렸다. 책의 중간쯤에 등장하는, 여진족이 세운 나라인 금(金)나라의 뿌리를 밝힌 대목은 꽤 충격적이다.
"금나라 시조의 이름은 합부(合富)인데 처음 고려로부터 왔다" (부족7 완안(完顔)편 金史)
"삼가 생각건대, 금나라의 시조는 원래 신라로부터 왔고, 완안씨(完顔氏)라고 하였으며, 다스리는 부를 완안부라고 하였다. 신라의 왕은 김씨 성인즉 금나라는 신라의 먼 친척이다" (부족7 완안편 원서(元書))
이렇게 청나라의 문화적 역량이 집결됐으면서 동이족의 뿌리를 밝히는 역사서가 오랜 기간 국내 사학계에서 외면 받았다는 것도 아이러니한 일이다. 1993년 단 한차례 원문이 발간됐을 뿐 지금까지 그 누구도 한글 번역을 시도한 적이 없다.
그간 학계는 이 책이 중국 정통 25서에 포함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여진족의 관점에서 서술된 '연구서적'에 불과하다는 입장을 보여 왔다. 실제 이 책은 훈고학의 전통에 따라 과거 중국 25서에 묘사된 만주 지역의 국가와 강역에 대한 내용을 재해석하고 오류를 바로 잡는 데에 집중한다. 때문에 전문 학자들은 25서 원문을 바로 참고하면 될 뿐이라는 입장인 것.
물론 모든 강단 사학계가 이 같은 입장을 취한 것은 아니다. 단군학회 회장인 선문대 이형구(64) 교수는 "내용의 진위를 떠나 청나라 관찬(官纂·관청에서 편찬한 서적)이기 때문에 그 중요성은 오래전부터 인식되어 왔다"며 "우리와 연관된 내용이 많으므로 번역이 뒤늦은 감이 있지만 조심해서 취사선택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교수가 바라보는 '민감성'의 근원은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함경도 이북에 살았던 여진족의 성격 때문이다. 단군을 뿌리로 하는 여진이기 때문에 우리와 사촌 격임은 확실하지만 그들의 주장을 모두 수용하면 우리의 역사가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게다가 이 책이 갖는 한계와 미스터리도 적지 않다. 무엇보다 우리 민족의 원류라 알려진 숙신과 부여 읍루 물길이 다 포함됐음에도 '고구려'가 서술되지 않았다는 점이 가장 대표적이다. 그럼에도 이 책은 한반도에 머물고 있던 우리 역사의 숨통을 틔워줄 것이라는 전망이 많다.
이 책의 감수를 맡은 파워북 기획위원 홍순만 씨는 "실증주의에 매몰된 우리 강단사학계는 한반도라는 강역을 지키고 민족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제대로 된 우리의 역사를 외면해 온 측면이 없지 않다"면서 "정보기술(IT)이라는 새로운 유목 환경이 열린 새로운 시대에는 만주 유목민의 역사를 제대로 아는 것이 큰 힘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남한산성의 치욕'을 겪은 조선의 지식인들은 중국을 정복한 여진족을 편향된 시각에서밖에 바라볼 수 없었다. 이제까지도 여진족은 '로또 맞은 사촌' 또는 '문명을 정복한 야만'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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