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ujin850676.tistory.com/18
■USA 캘리포니아 대학. 제러드 다이아몬드 교수“discover誌“1998년 6월호「일본인의 뿌리」
”고대 한국인의 선조가 일본의 원주민인 조몬인.아이누족을 정복하므로서 일본이라는 나라를 탄생시켰다.”
"Jap 가타카나 기원은 신라 향찰·이두"
히로시마대 교수
http://blog.daum.net/damule/8881879
카큐슈우인대 오오노 스즈무(1919∼) 교수
”한국인은 일본열도에 금속 제조 및 사용법 야금·금공 기술 염색·피혁제조·베틀 직조·기와 제조·의학·역법·천문학·조불(造佛)·사찰 건축·조탑 조경술등 모든것을 가져왔다(‘日本語の 世界’, 1980)
■18세기 고증학자 토우테이칸은, 고대논문 「일본결척」을 인용하여
“응신왕 시대에 백제가 봉녀(縫女) 2명을 보내주어 비로소 임금과 신하들이 한복을 입게 되었다.
그렇지만 그때까지 서민들은 옷을 입지 않은 벌거숭이 모양이었다”고 지적했다.
여왕 등극 때에는 참여한 만조백관 모두가 백제옷을 입었다고 전해진다.
■Jap 헤이안 시대(794년~1185년).JPG
https://www.dogdrip.net/userdog/296559956
■18세기 프랑스 신부 레지 고조선 Chi-na 사료
고조선, 서토 산동ㆍ강남을 점유하다.
B.C. 1324년 치세를 시작한 상나라 무정(武丁) 치세 때의 일시적인 세력 약화는
고조선이 강남과 산동 지방의 주인이 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고조선은 진시황 통치 전까지는 강남과 산동에 자리했었다.
http://www.gasengi.com/m/bbs/board.php?bo_table=commu08&wr_id=1196475&sca=&sfl=wr_subject%7C%7Cwr_
■ 도표로 한눈에 보는 천년 사직 고(구)려(KOREA)의 위엄.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ch1002&logNo=30152299778
고구려와 백제는 전성시에 강병이 100만이고 남으로는 오(吳), 월(越)의 나라를
침입하였고, 북으로는 유주,연,제,노나라를 휘어잡아 중국의 커다란 위협이 되었다.
수(隨) 왕조의 멸망도 요동 정벌에 의한 것입니다."
高麗百濟 全盛之時 强兵百萬 南侵吳越 北撓幽燕齊魯 爲中國巨 隋皇失馭 由於征遼
-삼국사기 <최치원전>
■ 요동(KOREA)에서 헛되이 죽지 않으리(无向辽东浪死歌)'
http://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commu&wr_id=190581
■ 서토 북조사를 연 북위도 고(구)려의 준식민지급.
북위가 고구려와 동맹 강화를 위해 당시 고구려 귀족 가문과 혼인을 하는데 이 문소황후의 아들이 8대 북위 선무제로 등극하군요.
이후 지지 기반이 약했던 고구려계 선무제는
자신의 외삼촌인 고조와 고현을 불러 들이고 아예 고구려인만 따로 추대하는 고려국대중정(高麗國大中正)이라는 벼슬까지 만들어 북위 조정내에 고구려파벌 붕당을 만들어 장악해버림.
북위의 권력을 쥔 고구려인
http://blog.naver.com/csred7/80130397982������
■ (동북방의 거란, 말갈(여진)등과 열도의 왜(Jap)등에) 수천년 동방문명권을 구축 군림해온
우리 고조선 고구려문명권의 영향력에 대한 자각.
고(구)려(KOREA)의 토대가 되는 초기 고조선 토착재지 5부는
이후
신성한 태왕을 중심으로 동서남북 사방을 점하며 천하를 지배하는 5부 행정 대도시 문명으로 발전 이후
남북국시대에 발해 5경과 신라 5소경에 이런 발해의 5경 체계는
다시 북방의 패자가 되는 요의 5경 체계로
대금 역시 고구려계 국무총리가 송을 멸망시키고 북경에 중도 건설을 총지휘. 이후 쿠빌라이는 이런 대금이 닦아놓은 서토 강북을 기반으로 몽골 내부 분열시기에 물자를 통제하면서 대칸에 오를 수 있는 실질적 힘이 되군요.(이를 바탕으로 남송 정벌)
※ 오늘날 서토국(Chi-na)의 수도가 북경이 된 연원.
오늘날 도시 배수로와 큰 차이가 없었던 신라 서라벌의 도시 인프라.
■ 유럽 최대 도시라는 로마보다 더 컸던 세계 4대 대도시 중 하나였던 100만의 거대 신라 서라벌.
서라벌은 바둑판 형태의 정렬된 계획도시 아래
일정 블럭의 방이라는 각 구역내 공간에는 각 집안내 우물 옆에 배수로가 집밖 담장의 소배수로를 통해 다시 대배수로 연결되어 있는게 확인되군요(길도 마차가 단니는 도로와 사람이 단니는 인도가 구분)
천년의 신라 수도였던 서라벌은 남북국시대 전성기를 맞으며 지금의 수도 서울 광역시(거대 메트로 폴리탄)처럼 지속적으로 팽창(삼국시대 이미 우리는 유럽 최대 도시인 로마에 비견되는 고구려 3경, 백제 사비성, 신라 서라벌의 5개 이상의 거대 대도시 체재를 구축)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eunayoon715&logNo=220882810189&proxyReferer=https:%2F%2F
서라벌 디지털 복원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commu07&wr_id=2096873
■ 발해
당나라 산둥 등주 공격
장문휴는 732년(인안 13) 무왕의 명령을 받아 수군을 이끌고 산둥 반도에 있는 당의 국제무역항 등주를 공격해, 당의 동방정책에 큰 타격을 주었다.
발해 무왕의 대외팽창에 위협을 느낀 동북만주의 흑수말갈이 발해와 우호관계를 단절하고 당과의 연결을 꾀하여 발해를 위협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무왕은 흑수말갈의 정벌을 결정했으나 무왕의 동생 대문예가 발해와 당 사이에 전면전이 일어날 것을 우려해 흑수말갈의 정벌을 중지시키려다가 실패하고 당으로 망명했다.당에 대한 강경책으로 돌아선 발해는 수군을 동원하여 등주를 공격 초토화시켜버리고 육지로는 요서로 밀어버림.
흑수의 땅은 모두 발해에 복속되었다.
-발해고 무왕-
발해가 점차 강성함에 따라 흑수 역시 그 소속이 되었다.
-당회요 말갈-
■ '금나라 황릉의 모델은 고려 황릉(왕릉)이었다.’
12세기 북중국을 장악했던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1115∼1234) 황릉이 고려 황릉과 형제처럼 꼭 닮았다는 비교 연구가 국내에서 처음 나왔다. 금 태조 완안아골타(1068∼1123)가 10세기에 건국한 고려를 ‘부모의 나라’라고 불렀던 것을 감안하면, 당대 사회적 문화적 역량을 총집결시켰던 국책사업인 황릉 조성을 한반도에서 벤치마킹했던 것이다
장경희 한서대 문화재보존학과 교수는 최근 학술지 ‘동방학’에 게재한 논문 ‘12세기 고려·북송·금 황제릉의 비교 연구’에서 “고려와 금 황릉은 양식적으로 매우 유사하며 같은 시기 북송 황릉과 뚜렷이 구별된다”
http://news.donga.com/3/all/20140313/61666261/1
■정강의 변 : 송이 신라계 황제와 발해인 연합의 금나라에게 패하여 수도 변경(지금의 카이펑/개봉)이 함락되고, 송의 군주였던 휘종과 흠종 그리고 수많은 자녀들이 금나라에 포로로 잡혀간 사건.
女真酋長乃新羅人 (송막기문- 남송기록)
("여진의 지도자는 신라인이다")
■ '고려(KOREA)국왕대흠무언(高麗國王大欽茂言)'
≪속일본기(續日本紀)≫ ㅡ남북국시대 발해 문왕(文王) 대흠무가 왜국에 보낸 국서에.
천통 인안 대흥등 독자적 연호 사용.
인도의 타지마할의 기단 크기 94m, 건물 크기 57m
발해의 상경용천부 제2궁전 기단 크기 120m, 건물 크기 93.5m(당대 서토 당나라 장안성의 최대 건물인 함원전의 11칸보다 큰 무려 19칸)
■ (조선)황제 폐하(皇帝陛下)의 수(壽)가 남산(南山)처럼 높고, 덕(德)은 동해(東海)에 젖으시어...
성종 28권, 4년(1473 계사 ) 3월 13일(계묘) 3번째기사
일본국 경극전 경조윤 좌좌목씨 등이 사람을 보내 와서 토의를 바치다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commu07&wr_id=624145&page=
■정종실록 1권, 정종 1년 6월 1일 경자 6번째기사 1399년
일본국 사신들에게 군기감으로 하여금 불꽃놀이를 베풀게 하여 구경시키다
일본국(日本國) 사신이 예궐(詣闕)하니 주식(酒食)을 하사하고, 날이 이미 저물게 되자, 군기감(軍器監)으로 하여금 불꽃 놀이[火戲]를 베풀게 하여 구경시켰다.
■왜사(倭使)가 놀라서 말하였다.
"이것은 인력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천신(天神)이 시켜서 그런 것이다."
■세조실록
야인과 왜인들은 모두 우리의 번리이고 우리의 신민이니
흑룡강, 속평강, 건주위, 올량합, 이만주 동창등 심처 야인과 삼위 달자가 관문을 두드리고 입조하기를 청하거든, 그 종인을 줄여서 후대하여 올려보내라
옥스퍼드대 루이스 교수 논문
“일본이 조선통신사의 한 차례 방문에 쓴 접대비용은 (일본의) 한 해 쌀 수확량의 12%를 넘었다.”
■ 루이스 교수는 “막부정권은 문명국인 조선과의 교류를 통해 피지배층에 대한 권위를 강화하고 수준 높은 문화를 받아들이기 위해 조선통신사를 지속하길 원했지만 19세기에 이르러 접대비용이 ‘파괴적인 수준’이 되자 이를 중지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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